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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가인 개인전 <Double Penetrating>


박가인 개인전 / Solo Exhibition by Gaain Bahc

지독하리만큼 괴이한 포르노를 본 적이 있는가? 인간의 섹스 판타지에 대한 천태만상이 아무렇지 않게 이루어지는 과정과 결과물은 그 자체로도 참 환장할 노릇이다. 아니 오히려 경외심마저 들기도 한다. 거의 극한까지 다다른 그 내용들은 이것이 인간의 왜곡된 욕망인지 아니면 그것의 솔직한 표출인지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이 전시의 제목인 'Double Penetrating'은 서양의 하드코어 포르노에서 흔히 쓰이는 단어이다. 두 명의 남성 배우 사이에 샌드위치 된 여성 배우가 등장하는 형태를 두고 쓰이는 일종의 용어 같은 것이다. 물론 그들은 출연료를 대가로 연기하는 배우들이지만 여성 배우의 경우엔 그것이 연기인지 실제 괴로움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경우도 있다. 발기한 남근들에 둘러싸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 모습을 두고, 작가는 그것이 자신의 삶과 닮았으며 나아가 한국 사회속의 여성으로서의 억압된 삶과도 닮았다고 말한다.

2010년대 이후 한국의 여권의 신장과 성 평등에 관한 가시적 성과들이 여기저기서 제법 들려오곤 하지만, 아직 가부장의 기세가 절대적인 것은 사실이다. 성 역할이 아직 뚜렷하게 남아있는, 아니 그렇게 남길 바라는 가부장적 강요가 남아있는 남성 중심의 사회 속에서 젊은 여성으로서의 삶은 사소한 것 하나에도 두려워해야 하는 불안한 시간의 연속이다.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한 이야기들을 시각화 한다. 하지만 작가는 그 가부장을 격파하거나 억압된 여성들의 목소리를 대신 내어 주거나 하지 않는다. 그저 전시의 제목처럼 이도저도 못하는 상황에 놓여 단념한 것처럼 자신을 내보이며, 정작 속으로는 예리한 조롱을 섞은 비밀 이야기를 관객들과 나누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주요한 작품들을 들여다보자. <두 번의 회전>(2017)은 연인의 고환을 오랜 시간 촬영한 작품이다. 재미있게도 그것들은 스스로 움직이고 있다. 고환이 스스로 움직이기도 한다는 것은 대부분의 남성들은 알 길이 없는 사실이다. 게다가 작가는 피사체가 되는 남성 연인을 다리를 벌린 상태에서 장시간 있게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어색하고 불편한 자세로 장시간 치부를 드러내고 있는 남성, 그것의 세밀한 형태와 그것이 가진 비밀을 촬영하는 여성의 관계는 분명 무언가의 역전을 이루고 있다. 유흥가를 밤늦게 걷다 보면 종종 바닥에 널린 남성 전용 성매매 홍보 명함들을 볼 수가 있다. 대부분이 노골적인 여성들의 사진을 담고 있으며 자극적인 문구가 적혀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 노골적인 사진들이 어떤 문제가 되었는지 다른 이미지들로 교체된 채 배포되고 있다. 그 대체 이미지는 나비와 꽃, 붉은 과일 등인데 이는 연상이라는 고차원적인 전달력을 가지며 이전의 것으로부터 발전된 홍보물이 되었다. <들락날락하는 사랑>(2014)은 그 전단을 직접 수집한 후 그 이미지들을 1차원적으로 직역한 작업이다.

<내 딸을 위한 정조대 드로잉>(2015)는 조선 민간설화에서 영감을 얻은 작업이다. 어눌한 농부가 부인의 정절을 의심하여 부인의 사타구니에 사슴 그림을 그려 놓았는데 정작 부인은 이웃 총각과 운우지정을 나눈다. 엉망이 된 사슴 그림을 허겁지겁 다시 그려 넣는다는 것이 기존 누운 사슴이 아닌 일어선 사슴을 그려버렸고, 이를 본 농부는 부인의 외도를 의심하였으나 부인의 '사슴이 어찌 앉아만 있을 수 있느냐'는 말에 오히려 사죄를 하였다는 내용이다. 작가는 이 이야기 속 사슴 그림을 딸의 순결을 원했던 자신의 아버지에게 그리게 했다.

관음증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몰카 야동]서울 길거리 치마 속 도촬>(2017)은 치마를 입은 여성들의 신체를 무음 카메라로 촬영하는 범인들을 거꾸로 그들을 촬영하려는 시도이다. 여성들은 남성들로부터 자신의 신체를 보호하기엔 아직 어려움이 많다. 작가는 직접 짧은 테니스 스커트를 입고 치마 속에 소형 카메라를 집어넣은 채 도촬 범인들을 찾아 번화가를 거닌다. 작가의 유쾌하지만 냉소 섞인 작업들은 가부장적 남성들의 불쾌한 작태들을 꼬집어내지만 직접적인 공격 같은 형태는 아니다. 자칫 너무나도 서글퍼질 수도 있는 이야기들을 그다지 심각하지 않게 풀어내며 그들을 향한 방어기제로 사용할 뿐이다. 앞서 언급하였듯 작가의 작업의 근간은 가부장적 남근사회가 여성, 특히 젊은 여성을 대상화하거나 소비하는 행태에 대한 조롱이다. 하지만 그러한 조롱이라는 행동은 이미 어떤 노력으로도 개선이나 역전이 불가능해 보여 계속 당하면서도 포기해버린 사람, 엎친 데 덮친 상황에 놓인 사람의 마지막 호신술일지도 모른다.

독립 큐레이터

문두성

로라 멀비(Laura Mulvey)는 그녀의 에세이 <시각적 쾌락>을 통해 영화에 드러나는 가부장적 사회의 남성적 시선(male gaze)을 지적하였다. 그녀의 주장에 따르면 남성적 시선은 여성을 동등한 인간으로서의 정체를 부정하고 육체만으로 흠모되는 대상으로 격하시킨다. 또한 가부장제 사회의 무의식이 영화의 형태를 구조화시켜 남성은 능동적인 주체, 여성은 수동적인 객체로 묘사된다. 관객은 그 구조에 길들여지며, 심지어 여성마저 그러한 객체로서의 여성을 수용하게 된다. 시각적 쾌락의 대상으로서 여성, 내러티브에 끌려가는 피주체, 여성은 언제나 객체이자 남성의 시각적 욕망의 대상으로 재현되었다.

내가 인지하는 나의 정체성 A를 어떠한 타자가 소문자 a나 전혀 다른 B라고 주장할 때 정체성의 혼란이 발생할 수 있다. 누군가는 그 주장에 대해 분노하거나 저항할 것이고, 억울함에 흐느끼거나 불안함에 휩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박가인은 부정되는 여성의 정체성에 대해 분노하기보다 오히려 즐기는 쪽에 가깝다. 박가인의 작품은 노골적이고 엉뚱한 유머 이면에 섬뜩함이 묻어 있다. 그것은 성적 정체를 떠나 동등한 인간임이 부정당하는 현실에 대한 그녀의 비웃음이다. 박가인은 성적 대상으로 여성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구조속에 잘 포장된 남성적 시선을 무자비하게 뜯어 펼쳐 놓는다. 그렇기에 그녀의 작품은 전혀 아름답지 않고 아름다워서도 안된다. 어쩌면 아름다움 속에 다시 숨어버릴 남성적 시선과 폭력을 비판하기 위해 그 아름다움마저 해체시키고 찢어버린다.

역설적인 것은 그럼에도 그녀의 작품은 유쾌하다는 점이다. 상처는 당시에 고통스럽지만 극복되면 삶의 흔적이자 추억이 된다. 절규나 분노는 피해자 또는 약자가 표현할 수 있는 원초적인 반응이다. 박가인은 피해자적 입장에서 접근하기 보다 오히려 이러한 불평등적 현실을 너털웃음 치며 조롱한다. 상처 앞에서 우는 것마저 남성적 시선에 길들여진 여성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우리의 압축된 역사 가운데 그 누구도 하지 못한 빠른 민주화와 산업화를 이루었다. 하지만 화려하게 포장된 외관 속에 미처 정리되지 못한 쓰레기 더미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 특히 오랫동안 억압되어 왔던 여성의 인권은 가부장적 사회 구조와 문화 속에 깊숙이 박혀있어 그 뿌리가 어디인지 파악하는 것도 쉽지가 않다. "여성의 의미는 성별적 차이이다."라는 말이 있다. 다시 말해 남성과 여성의 차이는 성별 말고 아무 것도 없다는 뜻이다. 박가인은 그녀의 작품들을 통해 피해자적 입장에서 불평하기보다는 미처 정리되지 못한 우리의 문화적 쓰레기들을 꺼내 여성적 권리이 요구가 아닌 모두가 똑같은 인간임을 외치고 있다.

니트 디렉터

한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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